[테라쇼크 후폭풍] "가상화폐 못 믿어"... 디지털화폐(CBDC)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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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쇼크 후폭풍] "가상화폐 못 믿어"... 디지털화폐(CBDC)가 뜬다

정명섭 기자 입력 : 2022-06-08 11:00:00
  • 페이스북 가상화폐 발행 계획, 주요국 CBDC 인식 바꿔

  • 테라·루나 사태로 "정부가 디지털화폐 발행해야" 목소리

서울 서초구 빗썸 고객센터 전광판에 루나 차트가 띄워져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산 가상화폐 테라USD(UST)와 루나가 폭락해 국내외 투자자들이 대규모 손실을 보자,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CBDC)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CBDC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법정 화폐를 의미한다. 198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토빈 전 예일대 교수가 처음 제안했다. 그는 당시 휴대가 불편하고 이자 지급이 없는 실물 지폐와 동전 대신 온라인 예금계좌를 개인에게 제공하는 개념을 제시했다.
 
CBDC가 기존 현금과 다른 점은 정부가 모든 거래를 낱낱이 알 수 있는 대신 자동으로 이자가 지급된다는 점이다. 특정 시간대에만 이용할 수 있도록 시간도 조절할 수 있다. 중앙은행이 발행한다는 점에서 민간이 발행하는 가상화폐 대비 신용 위험도 적다. CBDC는 분산원장 기술(블록체인)의 발전과 이를 토대로 한 세계 최초의 가상화폐 ‘비트코인’의 등장으로 논의가 조금씩 진전됐다. 이후 페이스북의 가상화폐 발행 선언, 테라·루나 폭락 사태 발생으로 주요국은 CBDC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페이스북, 가상화폐 발행 예고하자... 美·EU, CBDC에 대한 태도 전환
주요 선진국은 금융시스템과 지급결제제도가 잘 정비돼 있어 CBDC를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2019년부터다. 당시 페이스북(현 메타)이 스테이블코인(특정 자산과 가치가 연동된 가상화폐) ‘디엠’을 발행하겠다고 밝히면서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왓츠앱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송금과 구매, 결제에 활용할 수 있는 코인을 만드는 게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20억명에 달하는 페이스북 패밀리 앱 이용자 누구나 자유롭게 자금을 이동할 수 있다고 페이스북은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정부는 자금세탁, 개인정보 침해 이슈 등을 거론하며 페이스북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제동을 걸었다. 당국의 가장 큰 우려는 페이스북의 시장지배력이었다. 페이스북의 영향력이 가상화폐 시장과 연결되면 달러와 유로의 기축통화 지위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과 유럽 정부는 가상화폐에 대한 규제 당국의 검토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디엠을 발행하지 말라고 페이스북에 요구했고, 페이스북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가상화폐 발행 프로젝트를 접었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옛 페이스북) CEO [사진=연합뉴스]

스테이블코인 ‘테라·루나’ 무너지자 CBDC 필요성 더 커져
이후에도 가상화폐와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2020년에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하자 갈 곳을 잃은 뭉칫돈이 가상화폐에 몰렸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2월 4일 기준, 스테이블코인은 지난 1년간 시가총액이 500% 이상 성장했다. 전체 시가총액은 1700억 달러(약 213조5000억원) 이상이다.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예금·대출 등의 탈중앙화 금융(디파이)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가상자산 예치 규모는 지난 1년간 3.5배 증가한 2158억 달러(약 271조400억원)까지 커졌다.
 
그러던 중 혁신적인 스테이블코인으로 주목받던 테라·루나가 폭락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CBDC에 대한 주요국 중앙은행과 전문가들의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테라는 1달러 가치에 고정되도록 설계된 스테이블코인으로, 자매 코인인 루나와의 교환(차익 거래)으로 가격을 유지하는 게 특징이다. 예를 들어, 1테라가 1달러 이상으로 가격이 올라가면, 루나를 테라로 바꾸려는 이들이 나타난다. 1달러 가치의 루나로 1달러보다 비싼 테라로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테라 시스템은 중간에서 해당 이용자에게 루나를 받고 테라를 준다. 받은 루나는 소각된다. 시장에 루나 유통량은 줄고, 테라는 증가한다. 반대로 테라가 1달러 이하로 떨어지면, 테라를 루나로 바꾸려는 이들이 나타난다. 테라 시스템은 이번엔 테라를 받고 루나를 준다. 받는 테라는 소각한다. 이 같은 교환이 반복되면 1테라의 가치는 1달러에 수렴한다.
 
그러나 주요국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경기 성장이 둔화될 조짐이 보이자 가상화폐에 대한 투자 심리가 얼어붙었고, 테라와 루나의 가격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두 코인의 가격 안정성에 의구심을 느낀 투자자들은 테라를 대량 매도하기 시작했고, 가격 조정 알고리즘에 따라 루나 발행량이 증가하면서 루나 가격도 동반 하락했다. 두 코인은 결국 90% 이상 급락했다.
 

[그래픽=김효곤 기자]

“정부가 직접 화폐 발행해야”
민간이 발행하는 가상화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정부가 디지털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커지기 시작했다. 테라 사태는 스테이블코인이 실제 금융시장까지 위협할 수 있고, 유사수신행위나 사기 같은 범죄에도 악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이런 움직임에 불을 붙였다. 특히 중앙은행, 금융기관과 같이 강한 규제를 받는 곳만 디지털 화폐와 가상화폐를 발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더 힘이 실렸다.
 
실제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레이얼 브레이너드 부의장은 지난달 말 미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에서 CBDC가 금융시장 안정성 유지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기축통화국으로서 막대한 경제적 이점을 누려온 미국이 그동안 CBDC 도입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태도가 크게 바뀌었다.
 
미국은 지난 3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가상자산의 책임 있는 개발을 위한 행정명령’을 발표한 이후 재무부와 연준을 중심으로 CBDC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재무부는 CBDC와 민간 발행 가상화폐의 관계, CBDC가 금융시스템과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 다른 나라 CBDC가 미국 국익에 미치는 영향 등을 연구하고 있다. 연준은 CBDC가 지급결제 시스템의 효율성과 비용 절감에 미치는 영향, 통화정책에 미치는 영향 등을 살펴보고 있다.
 
주요국 중에선 중국이 CBDC 연구에 가장 적극적이다. 중국은 미국의 달러 패권에 맞서기 위해 2014년부터 CBDC 연구를 시작했다. 2020~2021년에 선전과 쑤저우, 베이징 등 주요 도시에서 순차적으로 CBDC를 시범 운영했고, 지난해 3월에는 홍콩 주민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실시하기도 했다. 스웨덴도 현금 이용 감소 등을 이유로 2016년부터 CBDC 도입 논의를 진행해왔다. 유럽연합(EU)은 CBDC 도입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지난해 7월부터 ‘디지털 유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한국에선 한국은행이 지난해부터 CBDC 모의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이달 말까지 1차 테스트를 진행하고, 하반기부터는 시중은행 등 주요 금융기관과 확대 실험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주요국이 CBDC 연구와 실험에 나섰지만 실제 상용화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먼저 CBDC가 도입되면 기존 은행의 역할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 CBDC가 일반 은행 예금과 직접적인 경쟁 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은행의 경우 예금이 줄면 가계와 기업에 그만큼 대출을 해줄 수 없게 된다. 이에 미국 은행업계 단체인 미국은행연합회(ABA)와 은행정책연구소(BPI)는 CBDC 도입에 반대하고 있다.
 
해킹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방안도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CBDC는 실제 돈을 취급하는 만큼, 전 세계 해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브레이너드 부의장은 CBDC에 필요한 보안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최소 5년은 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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